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독소 불가침조약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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== 평가 == 조약을 체결한 당사자였던 소련은 페레스트로이카 말 소련 인민대표대회의 결의로 공개하는 1990년까지 비밀조항의 내용을 부인했고,[* 당시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비롯해 [[카틴 학살]] 등 여러 민감할 수도 있는 과거사 문서를 공개한데는 [[폴란드]]의 줄기찬 요구도 있었다. 당사자인 몰로토프는 말년까지도 펠릭스 추예프와의 인터뷰에서 비밀조항의 존재는 서방의 모략이라고 꿋꿋하게 부인했다.] 후계국인 [[러시아|러시아 연방]]이 소련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면서 밀약의 존재를 사실상 인정했다. 다만 러시아는 이에 대한 책임은 모두 [[나치 독일]] 그리고 소련에 넘기고 있고, 과거에 대한 사과는 거부하고 있다.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보인 소극성은 소련이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시킨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. 스탈린의 제안을 건성으로 취급한 당시 영국 총리 [[네빌 체임벌린]]과 프랑스 정치권([[알베르 르브룅]] 대통령 및 [[폴 레노]] 총리)이 이 조약의 체결에 책임이 있다고 평가받으며, 특히 체임벌린의 오판은 심각하게 비판받는다. 왜냐하면 프랑스는 당시 제3공화국 특유의 정쟁으로 대외정책에 크게 신경을 쓸 새가 없어서 오로지 영국의 방침에 따라간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. 체임벌린은 영불과 동맹을 맺으려는 소련에 대해 소극적으로 임하면서 [[뮌헨 협정]]을 통해 나치 독일과 동맹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를 사실상 독일에 넘겼다. 당시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언제든 독일과 협력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고, 실제로 스탈린은 히틀러를 돕는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전환했다. 미국의 선전포고 직전까지 독일에 체류하며 취재했고, 전후에 명저 <제3제국의 흥망>을 저술한 미국 기자 윌리엄 샤이러조차 이 조약의 책임을 두고 스탈린보다는 체임벌린을 더욱 비난했다. 그러나 독소 불가침조약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결국 '''자신들이 그토록 타도하려던 [[나치 독일]]과의 야합'''에 불과했다. 비록 영국과 프랑스의 행보나 다른 여러 가지 요소들도 무시할 수 없지만, 결국 스탈린이 이념적으로 정반대인 히틀러와 함께 불가침조약을 맺고 주변국을 침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'''스탈린 개인의 [[소비에트 제국|패권주의적]] 욕구''' 없이는 불가능했다. 실제로 조약 체결 이후 서구권 내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이 나치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폴란드 및 발트 3국, 핀란드를 침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소련 및 소련이 주도하는 공산당 체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. 당시 각국 공산당들은 내부적으로 여러 비판 여론이 있었음에도 소련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지지했다. 이는 당시 [[대숙청]] 등과 더불어 서구권 공산당원들이 대거 탈당하는 계기가 되었다. 일례로 미국에서는 독소 불가침조약 전후로 약 8,500명 가량의 미국 공산당원들이 탈당한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. 이는 조약 이전 전체 당원이었던 66,000명 중 약 13%에 달하는 수치였다.[* (출처) The Soviet World of American Communism, 1998] 소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당시 자국에 망명해 있던 [[독일]]과 [[오스트리아]] 공산주의자들을 [[게슈타포]]에 넘겨주면서 '''이념적으로 같은 사회주의자들까지 배신'''하는 모습을 보였다.[* [[https://en.wikipedia.org/wiki/Gestapo%E2%80%93NKVD_conferences|Gestapo–NKVD conferences (영어 위키피디아)]]] 이처럼 스탈린은 히틀러를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판단했지만,[*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기까지 이런 방식으로 영국, 폴란드, 소련을 유혹하면서 전쟁 준비를 해 왔다. 1933년 총리 취임 이후에는 폴란드에게 먼저 무역전쟁을 종결하자고 손을 내밀고 1934년 3월 1일부 독일-폴란드 불가침 조약과 무역 협정을 체결하였고 영국에게는 자신들이 영국과 전쟁할 의사가 없다고 강조하며 영국-독일 해군조약과 뮌헨 조약을 따내는 데 성공했었다.][* 그리고 사실 소련을 공격한다는 것이 몹시나 무리수에 가까운 일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히틀러가 생각이 있다면 금방 소련으로 침공해 올 일은 없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. 다만 스탈린 스스로 일으킨 [[대숙청]]으로 소련군의 힘이 약해지고 이로 인해 [[겨울전쟁]] 등에서 보인 추태를 바탕으로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야심을 키우게 되었으며, 결국 이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당분간은 일어날 리가 없으리라 착각했던 독소전쟁의 단초가 되었다.] 결국 유럽 전역에서 힘을 키운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소련을 상대로 [[독소전쟁|전쟁]]을 선포하면서 '''소련인 2천만명의 목숨'''을 앗아가게 되었고, 스탈린과 [[소련]]은 배신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. 이러한 측면에서 독소 불가침조약은 오늘날 러시아 입장에서 '''2차대전에서의 승리'''라는 [[국가신화]]의 정당성을 정면으로 부정할 수도 있기에 이를 필사적으로 정당화하려 한다. 반면 조약의 직접적인 피해국들인 [[발트 3국]]이나 [[폴란드]]는 해당 조약을 '''반세기 가까이 지속된 암흑기의 시작'''으로 여기면서 오늘날 러시아가 보여주는 태도를 극도로 경계하고 [[반러]] 여론을 강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다.[* 웃기게도 이렇게 무려 '''나치'''와 불가침조약 겸 영토 분할 협정까지 맺었던 러시아는 그 과거를 망각한 듯 본인들 맘에 안 드는 나라들에게는 죄다 나치 낙인을 찍어버리는 [[내로남불]]스런 행보를 보이고 있다.]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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